이아스 글
깨작깨작 ·
이아스

 

혁명, 그 단어 자체로 함축되는 시대에 ‘영웅들’의 이야기란 두고두고 구전을 타고 흐른다. 다만 이 땅의 영웅들은 역사 속의 오랜 인물들이 아니라 작금의 혼란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먼 위인들과는 다를 것이다. 전설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태양과 같이 칭송받으며 세상 만민에게 영향을 끼친다. 봉화를 이끌고, 별을 띄우며, 대륙을 횡단하는 동력 그 자체로써 기능할 것처럼.

그러나, 역사에 새겨질 업적을, 그 불변의 기록을 비웃듯 ‘이아스 중령’은 모습을 감췄다. 서사에 남긴 발자국을 뒤로했으나 누구도 그의 결단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아스는 이렇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유혈이 기반된 위업에 죄악이 없기란 불가능하지. 난세는 늘 폭력을 동반하니, 우리는 영원한 영웅이 아니야.’

 

 

 

 

 

영원한 영웅은 없다, 인가…… 스타인펠드는 오래전 그의 말을 곱씹으며 주인 없는 집무실을 살폈다. 윤곽도 가늠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등을 찾고 있자니 문밖에서의 소란이 가까워졌다.

 

 

―쿵!

 

"영웅! 영우웅?! 악마라고 정정해!"

"누가 혁명하던 놈 아니랄까 봐, 여름휴가에 대한 시위를 이딴 식으로 하네."

 

신랄한 비난과 함께 들이닥친 것은 이아스 산하의 소대원, 데이비스와 이자크였다.

 

데이비스는 중령이 날씨도 점지하고 탈영을 계획한 것이라며 신봉인지 염불인지 모를 저주를 외고 있었고 이자크는 꺼끌한 수염을 짧게 긁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짜증이 난 모양이었으나 건물 내를 고려할 이성은 남아있는지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질겅이는 것에 그쳤다.

 

 

"볼프강 산업이랑 문화 개발로 바쁘다며! 그 자식, 군에서 지분 줄일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에……!!!"

 

대륙 횡단 열차를 대체해도 되겠어. 데이비스는 기염은 거의 증기를 토하는 듯했다. 그의 자랑인 부드러운 금발이 곧 버터처럼 녹는대도 수긍할 만큼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으나 오는 내리 저 분노를 감당했을 이자크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 지척의 종이 뭉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둠살이 그득 낀 내부에서 흰 종이 무더기가 절규에 맞춰 박자라도 타는 양 휘청거리고 있었다. 풀썩, 먼저 쓰러진 것은 제풀에 지친 데이비스였다.

 

 

…어라.

 

정말 합이라도 맞추고 있었던 양 탑의 리듬 역시 시들해졌다. 정말이었나? 다른 책장에 축을 기댄 채 맥없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데이비스의 체념과 닮은 것도 같고.

 

그때였다.

 

종이가 휘청이던 쪽에서부터 땡그란 눈을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민트색의 머리카락을 양손에 돌돌 감아 뺨에 붙인 모습으로, 그 표정까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응을 보인 것은 데이비스 쪽이었다. 바닥과 동화되어가던 몸이 활어처럼 튀어 올랐고,

 

"지, 지금 내, 내, 내가 보는 게 헤네스……. 그, 그 미친년이 맞아?! 야, 너 무섭게 왜 이래!?!!?"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도 목격한 듯 데이비스의 목소리에서는 떨림이 느껴졌지만, 저 난리법썩이 과장은 아닌 모양인지 그녀의 상태가 이상함을 누구 하나 부정하지 않았다. 헉……. 곧 데이비스 역시 상태가 이상해졌다. 점차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헤네스가 본 것과 같은 실루엣을 포착한 것이었다.

 

 

 

 

 

 

 

원체 개인행동을 선호해 온 소대장이니 며칠 소식 없이 자리를 비우는 일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그 부재가 사흘을 넘기고,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땐……

 

“탈영……. 아니, 사라진 영웅을 찾게 해주십시오.”

 

폭우가 내린 직후였기에 족적을 기대했으나, 군장을 챙길 새도 없이 고온다습한 무더위가 찾아왔다. 담당하여 처리해야 할 일도 많거니와 중령씩이나 되는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명을 다한 영웅의 족적을 이유도 없이 물고 늘어지기엔 가혹한 날씨였다. 수락될 리 없는 요청이었으리라. 뙤약볕은 여전했고 이 열기가 가시지 않는 이상 이후로도 승낙은 어려울 테지. 그렇다면 차라리 토벌에라도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역사의 위대한 업적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남은 책임을 직면할 수밖에.

 

 

 

 

 

 

 

집무실의 문이 다시금 열린 것은 오르테가가 뒤늦게 합류했을 때였다. 오는 길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깔끔하게 넘겨두었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였다. …그렇게 늦지는 않은 건가? 허덕인 보람이 있는 것인지, 불도 밝히지 않은 실내를 보고 이들이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그러니 불을 놓은 등 하나를 벽에 걸고 창가에 다가서는 제게 여전히 인사 하나 없는 것이 묘했다. 친밀할 사이까지는 아니라지만,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라면 이 긴장감은 뭐지? 오르테가는 답해주지 않을 고민을 지속하는 대신 일을 시작하기 위해 커튼을 젖혔다. 이제껏 차단되었던 바깥의 공기가 후텁하게 끼침과 동시에 볕이 매섭도록 쏟아졌다. 그러나, 이렇게 잔상이 남을 만치 강렬한 빛이었음에도 뒤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 목덜미에 끼치는 쎄한 감각. 오르테가가 검게 울렁거리는 듯한 시야를 겨우 바로 하며 내부로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탑, 아니 성채에 가까운 형태의 서류더미……. 이제는 다섯 모두 아연한 표정이 되어 종이로 된 성문을 바라보았다.

 

 

> (아여기머라고쓰냐)

 

 

죽는 시늉을 하던 데이비스는 지면의 열기가 사그라드는 한밤이 되어서야 기운을 차렸다. 모형만큼 줄어든 종잇장을 팔랑거리며 서류철에 끼우는 작업을 마무리할 즘이 되니 집무실은 해가 들던 낮보다 훤해 보였다. 이제야 원형에 가까워진 바닥과 가구들을 훑어보던 데이비스는 사그라들었던 울화통이 다시금 치미는지 아니꼬운 낯으로 이아스의 책상을 노려보다가, 주인 없는 의자에 앉아 등까지 기대곤 불퉁한 시선을 아주 감아버렸다.

본래라면 결단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겠지만 이곳에 앉아있어야 할 이가 이제는 없다고, 우리는 버려진 것이리라는 의심이 제가 처리한 책무만큼 쌓인 채였다. 오만하게 굴더니만. 봐, 또 저만 도망갔잖아? 그럼에도 어쩐지 앉은 자리가 불편해 몸을 뒤척이려던 때, 누군가 저를 붙들었다. 당연히 한 명 쯤은 만류하겠지. 충성심이 강한 오르테가나, 은혜에 목숨을 건 스타인펠드라면 충분히 그럴만 했다.

 

"어이, 일어나.“

 

그들을 철저히 무시할 요량이었던 데이비스가 퍼뜩 눈을 떴다. 예상외의 목소리였다.

억세지도 않은 손길. 그늘진 얼굴을 한 이자크가 서늘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제 와서 편이라도 들게?"

 

무언가 행동을 개시하려던 데이비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붙들었으나, 더는 무엇도 하지 못했다. 이자크의 눈은 저를 쫓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