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엔 글 커미션
CM. @RySi ·
치엔

미팅을 망치는 방법

 

 

무슨 까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의 바닷바람은 중국의 것보다 소금기가 덜했다. 어쩌면 연호가 양국의 바닷바람을 많이 맡아 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금기가 덜하다는 것은 이 바람이 보편적인 바닷바람에 비해 덜 짜다는 사실을 내포했고, 덜 짜다는 말은 그의 고용주, 장 예 이 치엔이 바람의 맛을 느끼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그들이 자주 가곤 하던 구룡의 신식 거리가 아니라 배나 비행기로 몇 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와 있는 까닭은 간단했다. 치엔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만들어 팔기 위해 손에 쥐고 있는 마오타이주의 유통에 대해 상담할 일이 있다는 사업적인 제안 때문이었다. 치엔은 통역관을 이쪽에서 데리고 가겠다고 우겼다. 그 고집은 비즈니스 차원에서의 기 싸움 중 일부라고, 치엔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연호는 생각했다.

 

“늦는군요.”

 

그리고 먼 길을 지나 방문한 상대를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는 것도 비즈니스 차원의 기 싸움 중 일부겠지. 연호는 사업적인 대화를 이어 나가기는커녕 벌써 이십 분째 대기만 하고 있는데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그의 고용주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를 뱉었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만 해도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그는 어느새 팔짱을 단단히 끼고, 다리를 아무렇게나 꼰 채 몸을 비스듬히 눕혀 의자에 기대다시피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연호의 생각과 달리 치엔은 지루하다거나, 짜증이 나서 자세를 바꾼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까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숨통을 조이는 듯한 감각을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연호의 목소리가 뒤에서 떨어지자, 치엔은 팔짱을 풀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쁘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줄 수 있지. 조금은.”

 

그가 임의로 설정한 ‘조금’이 지나면 어떻게 할 건지 연호는 묻지 않았다. 다만 커피나 차 한 잔 제대로 내어 주지 않는 거래처의 태도가 의아한 것은 치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인에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도 모르는 채로 살기 위해 이것저것 공부했으나, 세상이 배운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본사에까지 직접 방문해 준 미래의 거래처 대표를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로부터 5분쯤 더 기다린 끝에 문이 열렸지만,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치엔과 통화한 적 있는 이 기업체의 대표는 이탈리아 남부 억양이 강한 남자였는데, 지금 들어온 사람은 몸에 맞는 유니폼을 차려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사업차 필요한 미팅이라고 나름대로 빗었는데도 제멋대로 흐트러진 치엔의 머리카락과 달리, 밝은 금발은 결이 좋은 직모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레모네이드인데, 이거라도 드시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금방 대표님께서 나오실 거예요.”

 

여자는 들고 온 쟁반에서 얼음이 든 레모네이드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우연일까? 연호는 탁자에 올라간 컵을 곁눈질했다. 옅은 노란색 액체가 얼음이 가득 담긴 컵에서 넘실거렸다. 저기에 레몬즙, 물, 구연산, 설탕 말고 또 뭐가 들어 있을까. 연호의 생각은 정체 모를 첨가물 쪽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암살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답게, 치엔은 그 레모네이드를 마시지 않았다.

 

“연호.”

 

그로부터 다시 십 분 뒤, 치엔은 뒤로 기댔던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낮은 탁자에 턱을 괴었다. 긴가민가하던 냄새가 마침내 구분된 까닭이다. 그를 따라온 경호원은 덩달아 긴장하며 작은 창문 바깥을 내다본다. 보통 사람의 머리 높이보다 50cm쯤 높게 자리 잡은 창가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보였다.

치엔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므로 무시했던 비매너였다. 회사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얼간이가 있으니 시가를 태우는 머저리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호로 말할 것 같으면 햇빛이 한 뼘도 채 들어오지 않는 건물의 무덤에서 타인과 빨랫줄을 공유하며 자라온 사람답게,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자마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이 회사 대표는 안 나올 것 같지?”

 

애초에 대표가 정말 있는지조차 불명확하다는 말을 삼킨 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말로 동의를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치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큰 몸이 위아래로 쭉 펴지면서 허리나 무릎, 어깨 등의 관절부를 재배치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돌아갈 때 가더라도…….”

 

기지개 한 번으로 지루함을 날리고 관절의 재배치를 마친 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그는 손가락을 빠져나간 머리카락 색과 마찬가지로 짙고 검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오랜 기다림을 겪었지만 화난 기색도, 불쾌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나긋하게 내뱉은 말은 연호를 긴장시켰다.

 

“누가 나를 여기까지 불렀는지, 얼굴은 좀 봐야겠다.”

 

치엔이 그의 얼굴만 얌전히 관찰한 뒤에 그대로 돌아 나와 베이징행 비행기를 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위에 서 있는 치엔을 떠올리고 속으로 고개를 거세게 내저었다.

유쾌하지 않은 상상은 조금이나마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으면 알아서 자제하기로 했다. 치엔과 함께 다니면 거의 늘 이렇다. 어떻게든 피를 볼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아니야. 잘된 일일지도 몰라.’

 

연호는 일부러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의 머리를 돌렸다. 그러잖아도 치엔의 파괴 충동이 슬슬 쌓였을 즈음이었으므로.

입장할 때 보았던 건물의 층수별 시설 구분을 떠올리며 연호는 치엔을 위해 방문을 열어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홍콩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클리셰는 이번에 등장하지 않았다. 문을 걷어차 열었더니 그 앞에 각목이나 쇠파이프 등을 쥔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장면을 보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5층이었나?”

 

연호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들이 있던 응접실이 3층이니 계단 두 개만 더 올라가면 명목상으로나마 만들어 둔 대표실이 나올 터였다. 치엔은 그 안에 자신과 통화했던 남자가 있을 가능성을 크게 쳐야 이 할로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응징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그는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복도를 걸었다.

사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업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겠지만, 치엔은 그들이 뭐라고 대답하든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말임을 알고 있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자 한다면 은원이 확실해야 한다. 은원을 확실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과 상대의 서열을 정리한다, 즉 상하 관계를 확립해 주제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네가 보기엔 얘들이 왜 이러는 것 같아?”

 

연호는 그가 저에게 물었다는 사실을 한 발짝 늦게 자각했다. 치엔을 함정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자면 열 손가락만 꼽아서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구룡의 일부거나 조직과 대립하던 놈들이다. 사업가인 장 예 이 치엔은 개인적으로 원한을 산 일이 없었다. 연호나 치엔이 모르는 곳에서 그를 향한 앙심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차피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을 계속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다.

 

“모르겠습니다.”

 

계속 머리를 굴려 봐도 그가 베이징으로 치엔을 따라온 뒤에는 더더욱 그런 일이 없었다. 중국에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도 없는데, 하물며 이탈리아 마피아에게? 연호가 머리를 굴릴 때, 치엔 역시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치엔이 열어젖힌 사장실 안은 비어 있지도 않았고, 아까 레모네이드를 가져다주었던 여자가 앉아 있지도 않았다.

큰 책상 앞에는 의자에 밧줄로 묶인 서양인이 입을 막은 테이프 사이로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책상 가장자리를 둘러싼 사내들은 모두 얼굴의 한 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마스크나 복면, 선글라스 등을 실내에서 착용한 모습은 다소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치엔은 이 일의 배후를 짐작했지만 사실 누구든 상관없었다.

 

“남의 사업에 재 뿌리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막후의 흑막은 치엔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가 이탈리아까지 날아오느라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기업 대표를 감금해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을 위장하고 치엔을 여기까지 부르는 것 그 자체. 아마도 진짜 의도는 치엔이 자리를 비운 사이 큰 스캔들을 일으켜서 마오타이주의 유통권을 어떻게 해 보려는 거겠지. 하지만 구룡에서 스카우트한 셋 중 연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이 그의 몫으로 올라오는 서류를 열심히 처리하고 있을 테니 시간 벌이라는 꿍꿍이는 이미 실패했다.

치엔이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연호는 혹시 총을 든 사람이 없는지 살피는 중이었다. 한 걸음을 잘못 내디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총소리 때문에 공황 상태가 된다면 치엔에게 대단한 민폐를 끼치는 셈이다. 다행히 흉흉한 얼굴을 한 남자들은 각자 손에 익은 둔기만을 들고 있었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치엔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굴면서 그런 말을 했다. 언제나처럼 몸에 걸친 창파오를 벗어 입구 근처의 옷걸이에 걸어 두고, 손마디를 푸는 모습은 연호가 보기에 나쁘게 된 상황을 다소 즐기는 듯도 했다. 기쁨은 감정의 일부이므로 그는 느끼지 못할 텐데도.

 

“그냥은 못 돌아가겠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치엔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였으므로, 말에 웃음기는 배어 있었으나 희락의 흔적은 없었다. 담배 냄새가 짙게 풍기는 사무실 안에서 첫 핏방울이 튀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치엔은 깔끔하고 정확한 발차기로 한 놈의 턱을 돌려 버리고, 바닥에 떨어져서 굴러다니는 파이프를 이어서 밀어 찼다. 치엔의 구두에 맞아 부러진 턱뼈가 피부를 뚫고 나오면서 흘린 몇 방울의 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줄줄 흐르기 시작하는 작은 폭포를 바라보던 치엔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연호는 그 얼굴을 보면서, 사냥감을 단숨에 집어삼키기 전에 뱀이 짓는 표정을 본다면 저것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다. 한 회사의 대표가 움직이는데 경호원이 없으면 이상하다는 이유로 연호가 따라왔지만, 사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치엔은 혼자서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아, 적당히 끝낼 수 없게 됐다.”

 

어차피 적당히 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내숭을 떤다. 사무실 안에 다수의 인원이 모여 있는데 영화에서 본 것처럼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지 않는다는 점은 칭찬해 줄 만했다. 그는 벽을 박차고 몸을 기울여 각목을 피했다. 추진력을 중간에 끊지 않고 돌진하는 방식을 통해 190cm의 큰 몸을 고스란히 무기로 이용했으며, 사장실의 라디오로 둔기를 막기도 했다.

연호는 곁눈질로 힐끔힐끔 치엔을 쳐다보면서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경호원과 함께 있는데도 치엔의 안전이 위협받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부정적으로 치미는 데다, 여기서 이놈들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면 베이징에 돌아가서 처리해야 하는 서류의 양이 늘어날 것은 자명했으므로, 그의 동기 또한 강력했다.

각목과 손을 테이프로 둘둘 말아 놓은 남자의 허벅지를 걷어차 캐비닛 옆에 처박으면서, 치엔은 가볍게 혀를 찼다. 다행히 그는 아직 피를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동정심은 모르는 감정이라서 느낄 수 없었다. 안타까움 또한 제게는 없었다. 대신 수많은 위협으로 날카롭게 벼려지고 예민하게 가다듬은 감각이 있었기에 치엔은 비강을 돌아다니는 피 냄새를 맡았고, 시각적인 자극도 고스란히 느꼈다. 여기저기서 흐르고 있는 혈액의 분수가 눈앞을 붉게 물들이는 게 아닌가, 그런 감각을 느꼈을 때 이성은 자취를 감추고 충동만이 남았다.

 

“치엔!”

 

그는 연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발길질을 멈추었다. 정확히는 연호가 붙든 손목의 사슬 문신 때문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고, 발밑에는 피 웅덩이가 고인 채였으며, 의자에 묶여 있던 미래의 거래처 사장은 실신한 채였다. 연호는 치엔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자 사장을 묶은 줄을 풀기 위해 움직였다. 연호가 불렀다기보다는 외친 것처럼 들리는 이름에 어떤 감정이 배었는지는 모른다. 치엔은 자신이 그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 마녀가 남긴 저주 탓임을 알지만, 뭐가 됐든 간에 이렇게 ‘돌아올 수단’이 있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에 가깝다고 여겼다.

 

“비행기를 타고 오래 왔으니, 시간만 버린 셈 치기엔 아쉬운데.”

 

웃는 얼굴이라지만, 얼굴과 신발이 온통 붉게 보일 정도로 피를 묻힌 채라면 그렇게 말해도 무서울 뿐이다. 연호는 당연한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 주는 대신, 아쉽다는 말에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엔은 그의 대답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멀리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은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들을 지나갔고,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덕에 큰 상처를 입지 않은 머저리가 처박힌 채 숨을 헐떡거리는 한구석을 향했다.

 

“닦아.”

 

당당한 걸음걸이로 남자의 코앞까지 다가가 피범벅인 신발을 내밀면서,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걸어 두었던 창파오를 옷걸이에서 꺼내 다시 몸에 걸치는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치엔은 인간의 비굴함을 익히 알았다. 이미 오래도록 정립된 정보가 뒤바뀔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종종 이렇게 실험적인 행동을 했다. 이번에 대상이 된 남자가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암흑가에 닿아 있는 장 예 이 치엔’의 정체가 밖으로 샐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살려 둘 마음은 없었지만……. 아주 혹여나, 몰락의 기저에서 바닥을 딛고 올라오는 무언가가 제 흥미를 끌 확률도 제로는 아니라고, 치엔은 생각했다.

바닥에 오랫동안 엎어져 있던 남자는 손을 떨면서도, 제 옷자락으로 치엔의 신발에 묻은 피를 열심히 닦아냈다. 어느 정도 깨끗해지긴 했지만 가장 처음 묻어서 신발에 착색된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 신발에 붙은 채 굳어 버린 핏자국을 바라보자니, 나름대로 애를 써 봐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혈흔이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한 채 시선을 올린 남자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지금 그의 얼굴을 설명하라고 하면 누구나 잔뜩 겁에 질려 있다고 말할 법한 표정이었으나, 치엔은 태연히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즐거울까?”

 

새카만 시선이 묻는 바를 그 남자가 어느 쪽으로 받아들였을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막상 그 목소리에 즐거움이라고는 한 올도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남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연호는 그 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 푼 밧줄을 한 손에 든 채 책상 위의 물티슈 상자를 열었다. 한 장을 꺼내 제 얼굴을 닦고, 다시 한 장을 꺼내 제 신발을 닦고, 또 한 장을 꺼내 옷소매에 튄 핏방울을 닦아냈다. 차림새가 얼추 멀끔해졌다고 생각되자, 연호는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여전히 자리에 선 치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배고프면 식사라도 하러 갈까?”

 

치엔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조로 그렇게 물었고, 연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구두를 열심히 핥아 핏자국을 지우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치엔은 기어이 그가 핏자국을 모조리 핥아 먹은 뒤에야 사장실 밖으로 나왔으나, 닦은 보람도 없이 구두가 다시금 얼룩진 꼴로 보자면 그 남자에게서는 흥미를 동하게 할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치엔의 흥미를 끌지 못한 그의 말로 역시 뻔했다.

밖으로 나온 치엔은 어깨에 사장으로 추정되는 이를 짐짝처럼 메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는 아직 기절한 상태였다. 연호는 자신의 사무실에 벌어진 참상을 마주하지 않게 된 그의 행운에 감탄하며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나름대로 짐작했다. 혹여 저 사장이 잠깐이나마 사무실 안에 벌어진 상황을 목격했다면……. 사장의 상황은 겁에 질려 있던 그 남자보다도 나빠지리라는 사실을.

 

“이탈리아에 왔으니, 이탈리아 요리겠지. 먹어 본 적 있어?”

“예? 아뇨.”

 

어차피 뭘 먹든 비슷하면서. 치엔은 맛을 모르니 식감이나 플레이팅 같은 다른 요소를 주로 따졌다. 그중에서도 식감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연호는 비행기에서 읽은 이탈리아 요리 목록 가운데 그가 좋아할 만한 식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리 이름을 몇 개 떠올렸다.

 

“그런데.”

 

그러다 문득 아까 맡았던 냄새의 정체에 대해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담배 냄새와는 다른, 뭔가를 태우던 냄새였는데. 치엔은 더 말해도 좋다는 듯이 그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까 그거, 무슨 냄새였을까요.”

 

치엔은 경호원의 둔감함을 비웃는 대신 건물 뒤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뒤뜰에는 작은 소각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서류가 타는 중이었다. 중요한 거래처의 서류……. 당장 꺼내면 몇 장쯤은 살릴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기에 연호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띠며 화로 앞을 얼쩡거렸다. 정말로 손을 집어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엔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보냈다.

 

“해외 유통도 그냥 내가 하는 게 낫겠어. 보안이 허술한 회사와 일을 틀 수는 없지.”

 

연호는 그 말을 앞으로 책상에 올라올 서류의 산이 한두 개 정도 추가될 거라는 뜻으로 이해했으며, 동시에 거래처 사장이라는 지위에서 단숨에 짐짝으로 추락한 이의 말로를 안타깝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