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 님의 커미션 작업물입니다. 원문 링크 https://posty.pe/nxiq7h
*전문 공개. 공포 10,402 자.
미로처럼 얽힌 어두운 골목 사이로 한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시장의 뒷골목처럼 난잡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흘렀으나 천장과 양쪽 상점에 달린 전구들이 드문드문 길을 비췄다. 폭포수처럼 구불거리는 그의 검은 머리 아래로 묵직한 먹빛 코트가 드리워졌다. 코트 소매 아래로 비져나온 그의 손은 길고 창백했으나 오랜 단련의 흔적으로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양 손목에 새겨진 사슬 모양의 문신이 옷소매에 가려졌다가 다시 보이기를 반복했다. 남자의 길게 찢어진 눈매는 그의 감정을 쉽게 짐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차가운 대리석처럼 건조하게 전방을 응시했다.
그는 비좁은 가게와 집들이 숨 막힐 듯 빽빽하게 늘어선 골목을 따라 좌우로 방향을 전환했다. 골목 어귀를 돌 때마다 그의 널따란 어깨가 튀어나온 좌판에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지나갔다. 왼쪽, 다음엔 오른쪽. 새장이 걸린 노점을 끼고 다시 오른쪽, 그리고 왼쪽. 미궁처럼 끝없이 연결된 교차로 속에서 몸을 돌리다 보면, 선택받은 이를 위한 비밀 통로처럼 계단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다. 남자는 골목 중간에 설치된 계단을 통해 한 층 위로 올라갔다. 위층의 모습도 아래층과 다름없이 어둡고 칙칙했다. 복도를 닮은 낡은 골목의 풍경과 습하고 퀴퀴한 음지의 냄새가 발걸음마다 따라붙었다. 허름한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구두는 물웅덩이를 피해 축축한 땅을 디디며 나아갔다. 그의 발밑에는 얼룩진 회색 콘크리트가 깔려 있었고 머리 위로는 어둠, 그저 어둠뿐이었다.
구룡성채 안에서 그를 본 사람은 더러 있었으나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더욱 적었다. 그러나 구룡의 주민들이 조직에 다달이 바치는 돈은 한 푼도 빠짐없이 그의 감시 아래를 거쳐 갔다. 흑암 속 조직의 일원 장 예 이 치엔은 그런 사람이었다. 소리 없이 퍼져 나가는 검은 연기처럼, 그는 고립된 무법지대의 곳곳에 손을 뻗고 있었다.
치엔은 구룡성채의 셀 수 없이 많은 방 중 하나의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벌집처럼 들어앉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방들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었다.
방안은 마치 전체가 녹빛 이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안쪽으로 통하는 햇빛은 단 한 줄도 없었다. 검고 지저분한 전선으로 연결된 누런 형광등 하나가 이 방의 유일한 태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안에는 곰팡이처럼 푸르스름한 색채가 감돌았다.
방 한쪽에 놓인 싱크대 겸 세면대는 검은 땟국물과 미세한 금으로 점령당한 지 오래였다. 변기와 수도꼭지 하나가 놓인 화장실은 성긴 발로 대충 가려져 있었다. 낡아빠진 난로와 선풍기, 두꺼운 구형 텔레비전은 모두 코드가 뽑힌 채 멈춰 있었다. 그러나 방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서 책상과 바닥은 유난히 말끔했다. 책상 위의 필기구와 종이, 그리고 카세트테이프는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치엔의 집이 아니었다. 이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번듯하게 생긴 자가는 구룡성채의 맨션 A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아래층 정육점 점원으로 일하는 한 청년의 집이다. 그가 낮에는 일을 하러 집을 비우고 밤에 잠깐 돌아와서 잠만 자는 생활을 하는 것을 알고 조직이 그동안 이 방을 쓰겠다고 했을 뿐이다. 조직이 사용한 흔적을 치워야 하는 청년의 수고로움이나, 조직과 청년의 동선이 겹칠 경우에 끼치게 될 불편 따위에 조직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피떡이 된 사람을 추궁하는 고문과 폭행이 밤을 넘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영민한 청년은 그런 날마다 제 집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치엔은 책상 옆에 놓인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구룡의 단칸방치고는 나름 넓은 축에 속한다지만 그의 주위를 둘러싸며 직사각형으로 닫힌 방이 마치 수감자를 위한 독방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치엔은 구룡의 복잡한 중심부에 볼일이 있을 때면 이곳을 제 2의 사무실이자 휴게실처럼 사용했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조직의 업무에서부터 개인적인 사업 경영까지 매우 바쁜 일정이 그의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조직의 거래가 있기 전 단 십 분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치엔이 이곳을 사용할 때 감히 그의 허락 없이 드나들기를 시도하는 조직원은 없었다.
조직의 주요 인사라는 그가 두르고 있는 옷의 고급스러운 재질이 방의 나머지 풍경과 퍽 이질적이었다. 치엔 자신 역시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단순한 편리함과 습관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이 공간에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이 감각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도 굳이 정의를 내리려 시도하지 않았다. 이조차도 남들보다 결여된 감정적 역량 탓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이 공간과 제가 어떠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감각은 분명히 그의 속에 살아 있었다. 방안을 채운 녹빛 이끼가 그의 발끝부터 서서히 적셔 나갔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떨구었다. 방안은 고요했다.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그의 코를 통해 소리 없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공기였다. 구룡성채는 늘 습기로 차 있다. 싸구려 재료를 한데 넣고 푹 끓이는 냄비의 수증기, 부정한 정사를 즐기는 이의 추잡한 입김, 약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의 축축한 타액,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이의 찐득한 핏물. 이 모든 것들이 미궁의 콘크리트 벽마다 스며들어 있다. 그중 일부는 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웅덩이를 이루고, 일부는 공기 중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폐부로 순환한다. 가장 밑바닥부터 옥상까지, 최상부에서 말단까지. 그렇게 이곳의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구룡성채의 생태계였다.
장 치엔은 베이징을 본거지로 하는 재벌가의 일원이다. 그러나 베이징에 있는 고급 주택을 뒤로 하고 홍콩으로 건너온 그 해부터 그의 안에는 구룡성채에 대한 묘한 끌림이 있었다. 어쩌면 촘촘하게 벽과 칸막이로 가로막힌 공간이 그의 본성을 숨기는 것에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정상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그의 인생은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채 살아왔던 시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작은 방 안에 가두고 멀쩡한 겉껍질을 뒤집어쓰는 위선에 의해 길들여졌다. 그러니 값비싼 고가품으로 둘러싸인 고급 저택이 아닌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터전인 구룡성채가 오히려 그의 파괴적 본성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종종 하였다.
그는 저 자신이 빠끔거리는 물고기 같다고 여겼다. 좁다란 녹빛 수조 안에서 평생을 살다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지는 물고기. 그는 수조 바깥의 세상을 알지 못한 채 지느러미를 흔드는 일조차 잊고 가만히 물속을 부유한다. 물고기는 내부가 훤히 보이는 물고기 아파트에 살고 이끼를 뜯어 먹으며 연명한다. 그러나 정작 물고기를 서서히 죽이는 것은 물속에서 숨을 쉴수록 희박해져 가는 산소였다.
찍찍. 높고 새된 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쥐 한 마리가 그의 구두 옆을 스쳐서 방을 가로질러 달음박질했다. 그것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찌그러진 철제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식성이 특이한 것인지, 혹은 강한 생존력을 갖춘 덕인지 이 쥐는 사람의 손톱을 좋아했다. 의자 다리 옆에서 미처 치우지 못한 피투성이 손톱을 갉아 먹고 있던 녀석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에 있는 갈고리 모양의 흰색 반점 때문에 다른 쥐들로부터 쉽게 구별될 수 있었다. 피 튀기는 작업이 끝난 뒤 바닥에 남은 잔해는 어차피 뒷정리를 맡은 청년이 모두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아마 청년은 이 중 쥐의 먹이로 줄 손톱을 따로 빼놓아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톱을 따로 모아 냄비 안에 던져 놓으면 쥐는 단골손님처럼 찾아온다. 어느 때부턴가 구석의 냄비 안에는 살점이 붙어 있는 손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렇게 쥐가 이 방안의 익숙한 풍경이 된 지가 어언 두 주쯤. 아니 한 달? 어쩌면 석 달일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치엔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치엔은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옆으로 구부려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쥐는 어느새 손톱을 모두 먹어 치우고 냄비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할짝거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날렵하던 회색 몸뚱어리는 어느새 제법 통통해졌다. 치엔은 쥐의 코앞에 손을 내밀었다. 쥐는 동그란 귀를 쫑긋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그의 손바닥으로 폴짝 올라탔다.
쥐가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자 뻣뻣한 회색 털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새의 발톱보다 덜 날카로운 쥐의 발톱이 치엔의 굳은살 위를 지그시 눌렀다. 쥐를 내려다보는 치엔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바깥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직선으로 굳어 있던 치엔의 입매가 그린 듯한 곡선으로 말려 올라갔다.
“들어온나.”
문이 열리고, 그의 수하 중 한 명이 방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둥근 머리는 모두 밀어 이마 위쪽이 푸르스름했고, 검은 정장을 입은 몸은 단단해 보이면서 거친 느낌을 주었다. 턱은 양쪽에 혹이라도 달린 것처럼 강인했으며 화려한 문신이 목까지 감아올라 왔다. 조직원의 전형적인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허리를 푹 숙여 인사를 하더니 멀건 삼백안으로 치엔을 바라보며 보고했다.
“천룡사 양 사장이 보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보던 그 애송이가 아닙니다.”
“지가 누구라 카데?”
“양 웨이콴, 양 사장 동생이랍니다.”
“……가자.”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보고를 듣던 치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쥐는 그의 손바닥에서 바닥으로 단숨에 뛰어내리더니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치엔은 덜그럭거리는 삼절곤을 자신의 홀스터에 챙기고는 그 위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는 문 옆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인 조직원을 지나쳐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거래는 구룡성채의 어느 깊숙한 방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작은 빵 공장의 사무실 겸 회의실로 치엔은 걸음을 옮겼다. 공장 작업장의 옆에는 제법 큰 창고도 하나 딸려 있다. 물론 이곳은 단순한 창고가 아닌 마약 밀매에 사용되는 저장고이다. 빵 공장이 위장 사업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치엔은 작업장에서 회의실로 연결되는 문을 밀어젖혔다. 새로 도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을 비롯하여 회의실 내부는 여느 기업의 사무실과 비교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멀끔했다. 긴 책상과 푹신한 의자, 캐비닛과 정수기가 부족함 없이 갖춰져 있었다. 회의실 한쪽 벽에는 창립 기념일이 새겨진 전신 거울도 걸려 있었다. 수십억 위안이 오가는 거래의 고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조직이 공들여 꾸며 놓은 곳이었다.
치엔은 흰 조명이 비추는 회의실 안쪽 고동색 악어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사내를 빠르게 관찰했다. 이미 들은 대로 그와는 초면이었다. 푸근한 인상을 주는 이목구비 아래로는 턱살이 돼지비계처럼 늘어져 있었다. 안색은 방금 술이라도 한잔 걸친 것처럼 붉었다. 앉아 있는 자세에서 숨길 수 없는 거만함이 습관처럼 배어 나왔으나 치엔이 방안에 들어서자 그는 늘어져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치엔의 기다란 눈이 휘어졌다. 사장 동생을 보낼 정도라니, 천룡사에서 어지간히 똥줄이 탄 모양이었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 치엔은 차분히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 통성명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날카로운 눈은 사내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입이 양쪽으로 더욱 깊게 패이며 대인 관계용 미소를 만들어냈다. 사내의 눈이 어디선가 많이 본 눈이다 싶었더니, 그의 방 앞 골목에서 음식물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애꾸눈 암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치엔이 자리에 앉자마자 사내는 혀로 보랏빛 아랫입술을 핥더니 제 수행원에게 손짓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갈색 서류 봉투는 매끄럽게 옻칠 된 책상에 살며시 놓였다.
“말씀하신 대로 회계 서류와 우리 양 사장 인감까지 모두 받아왔습니다.”
치엔이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살피는 동안 그는 두툼한 손을 서로 비볐다.
“저…… 오늘 바로 물건을 받아 갈 수 있는 겁니까?”
“잔금만 치러 주이소. 그라믄 예서 천룡사 창고꺼제 바로 날라 드릴테이까네.”
치엔은 제 등 뒤에서 뒷짐을 진 채 대기하고 있는 조직원들을 향해 은근히 턱짓했다.
“그래서 잔금은?”
치엔의 눈이 서류 위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그의 표정이 풍기는 분위기는 상대에게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압박감을 선사했다.
남자는 가장자리로 눈알을 굴리면서 다시금 입술에 침을 발랐다.
“가능하면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치엔은 제 조직원들을 회의실 바깥으로 물렀다. 사내가 데리고 온 수하들도 뒤따라 나갔다. 썰렁한 회의실 안에 두 사람만 남자 사내의 태도는 씻어낸 듯 돌변했다. 그는 몸을 한껏 앞으로 숙이면서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바닥에 놓아두었던 돈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렸다. 그의 눈동자 속에 번들거리는 탐욕과 이기가 치엔의 건조한 눈에 담겼다.
“뭡니까?”
“에, 곤란한 말씀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 사정상 잔금을 치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돈 가방의 잠금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노란 금괴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제 사비로 대가는 넉넉하게 치러드리겠습니다. 금괴 가치로는 잔금을 충분히 치르고도 남을 겁니다.”
치엔은 사내가 가져온 금괴의 가치를 눈으로 대중하고는 회계 서류를 다시 훑었다. 조금 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공란이 눈에 들어왔다. 치엔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가지고 이거 받고 입 씻어 달라는 거 아입니까?”
“허허……. 조만간에 제가 양 사장으로부터 마약 거래 권한을 위임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와 신뢰를 쌓아 두는 것이 천룡사와의 비즈니스 관계에 장기적으로 좋지 않겠습니까?”
치엔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시선은 포식자의 형형한 탐색처럼 사내를 훑었다.
“요 금괴, 니가 천룡사 내부 자금 빼돌린 기 아이가. 그래가 니가 여 나온 기제. 내헌티 돈 멕여가 입 닫게 허고, 잔금 치르라 받은 현금 꽁치 묵을라가. 카믄 니가 물건도 묵고 돈 세탁꺼제 된다…… 그래 생각했다 아이가. 여가 어데라고…… 요래 빤한 수법을 써뿌네.”
치엔은 검지 손가락으로 돈 가방을 사내의 앞으로 밀어 보냈다.
“치아라. 내는 이 문제로 그짝이랑 할 말 없응께. 물건은 몬 주것구마.”
사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황과 다급함이 그의 얼굴에 밀려들었다. 돈이나 마약 말고도 걸린 것이 많은 문제인 듯했다. 승계 문제, 이권 다툼? 치엔은 거기까지 머리를 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저마저 끌어들여 갖고 놀려는 심산으로 거래를 시도했으니, 그대로 산주에게 보고하면 조만간 이곳과는 관계가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성가셨다. 감각이 예민하게 돋아나며 날카로운 가시를 세웠다. 저를 설득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사내의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치엔은 제 안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충동을 느꼈다. 검은 심연을 담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모기를 때려잡고 싶은 충동과 마찬가지로, 그의 근육은 거부하기 힘든 무의식적 힘에 이끌렸다.
치엔의 구두가 사내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사내가 신음을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마침내 윙윙거리던 그의 말이 그쳤다.
요란한 소리를 들은 바깥의 수하들이 회의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바닥에 쓰러진 양 웨이콴을 보고 그들은 벙진 표정을 지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치엔은 빙긋 웃었다.
“이 돼지…… 느그들이 데꼬 갈 기가, 아이모 거래를 쫑내뿌까.”
사태를 파악한 천룡사 측 인원이 먼저 움직였다. 치엔의 수하들과 몸싸움이 붙으며 네댓 명이 동시에 치엔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홀스터에 고정해 둔 삼절곤을 꺼내지 않고 맨주먹을 쥐었다. 양 웨이콴을 쓰러뜨리고도 혈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치엔의 몸을 잠식해 나가는 충동은 더 많은 타격과 더 많은 피를 원했다. 치엔은 그에 무표정으로 응답했다. 마치 기계처럼,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제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차례로 때려눕혔다.
탕! 총성이 들리자 치엔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천룡사에 권총을 가지고 있던 조직원이 한 명 있다. 몇 번의 총성이 더 들리자 치엔의 몸을 가리고 있는 소파에 구멍이 뚫렸다. 멍청한 조직원 몇 놈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치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옆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를 들어 올려 방패로 삼았다. 그리고 숨어 있던 자리에서 튀어 올라 번들거리는 구두코로 총을 든 남자의 손목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총이 바닥에 철그럭거리며 떨어졌다.
주인을 잃고 나동그라진 쇠붙이를 길고 창백한 손이 집어 들었다.
“하이고, 장난감은 빼고 하자이께.”
치엔은 총알이 떨어져 더 이상 발표되지 않을 때까지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잠시 방안의 모든 싸움이 멈추고, 두 다리로 서 있는 이들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탄창이 비어버린 총을 뒤로 내던졌다. 그리고 책상 위로 도움닫기를 해서 몸을 날리며 총을 들고 있던 남자의 관자놀이를 바닥에 으스러뜨렸다.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회의실 안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치엔은 살아남은 천룡사 조직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질척한 바닥 위로 발을 끌었다. 아직 한 명이 더 남았다.
바닥에 쓰러진 양 웨이콴은 육중한 몸을 움찔거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치엔은 그의 목덜미 옷깃을 잡고는 거울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거울 속에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자신과 목덜미가 잡혀 올려져 머리가 치엔의 허리께에서 매달려 있는 남자가 보였다. 치엔은 주머니에서 작은 잭나이프를 꺼냈다. 오른손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칼이 남자의 목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는 목덜미를 축축한 땀과 피로 적시며 온몸을 떨었다. 치엔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현 위로 활을 긋듯이 힘있게 오른팔을 움직여 목줄기를 갈랐다. 검붉은 핏방울이 서류의 검은 글자 위로 튀었다.
치엔의 수하들이 현장 정리에 나섰다. 치엔은 정수기 물로 손에 묻은 체액을 문질러 닦았다. 나머지 뒷정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그가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한 조직원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멈춰 세웠다.
“얼굴에…… 상처가 나셨습니다.”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무감정한 눈이 코앞의 조직원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그의 심중을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 치엔은 제 왼쪽 뺨에서 울컥이며 흘러내린 핏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자국이 그의 입꼬리에서 광대뼈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광증으로 흐려졌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를 막아 세운 조직원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장 예 이 치엔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양식은 그의 측근이라면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바였다. 게다가 그는 조금 전 상대 조직원과 그 간부를 맨몸으로 몰살시킨 장본인이니,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
치엔은 칼날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목구비는 이내 예의 미소를 다시 그려 내었다.
“맞나. 고맙다.”
그는 흰 손수건으로 피를 대강 닦아 내고는 조직원의 옆을 지나쳤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웃음 짓고 있었다. 방을 떠나면서 치엔은 마지막까지 태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프네, 아파…….”
그는 방에 돌아와 상처를 처치했다. 방 한켠에 놓여 있는 알콜로 소독을 한 다음 감염을 막기 위해 밴드를 붙이는 손길이 능숙했다. 처치를 마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 작업이 쌓여 있을 테고, 무엇보다 방금 벌어진 사건이 산주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난리를 칠 테니 그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치엔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제 속에서 끓어오르는 파괴의 충동을 참지 못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굳이 책임 소재를 찾는다면 그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겠지만 죄책감이나 불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제가 해결을 하리라는 확신으로 모든 것을 덮어 두었다.
그때 방 한쪽에서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쥐가 냄비 안에 그대로 있었다. 쥐는 툭 튀어나온 검은 눈알을 굴리며 벌어진 앞니로 열심히 손톱을 갉아 먹었다. 치엔은 무표정하게 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뻗어 쥐의 몸통을 한 손에 잡았다. 쥐가 채 몸부림을 치기도 전에 물컹한 몸뚱어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찍! 제 몸집에 걸맞은 앙증맞은 단말마가 터졌다. 뒤이어 치엔의 구둣발이 취의 몸을 짓눌렀다. 뼈가 연쇄적으로 으스러지는 감각이 다리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바닥에서 구두를 떼어낸 그는 굳이 아래를 확인하지 않았다. 사체를 이대로 놔두면 얼마 뒤에 청년이 알아서 치울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중 그에게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의 살생과 폭력에 아무런 당위나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치엔은 그것을 찾을 수 없었고 찾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영양의 등가죽이 날카로운 발톱에 의해 찢기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무런 까닭 없이 해가 뜨고 파도가 치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쥐와 그의 만남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면 이별 역시 동일하게 무의미한 사건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것이 치엔이 모태에서부터 뼈와 가죽에 새기고 태어난 세상의 원리였다.
그는 말없이 문을 열고 어두운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자리를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둔탁하고 규칙적인 소리로 찬 바닥을 울렸다.